|
입추가 지났지만, 간밤에 내린 눈으로 산야가 온통 겨울왕국이다. 다행히 새벽부터 내린 비로 차량운행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양동마을 주차장에 도착하여 약 10분 걸어 양동마을에 도착했다.
주차장 옆에는 예전에 없었던 ‘양동마을 문화관’이 있었다. 따뜻하게 방한복을 입었으나 차가운 날씨에 비까지 내려 더욱 싸늘하게 느껴졌다. 추운 날씨 임에도 관광객이 제법 붐비었다. 초가집과 고관대작의 기와집이 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마을의 규모가 크고 띄엄띄엄 형성되어 있었다.
경주 양동마을, 봉화 닭실마을, 안동 하회마을이 우리나라 3대 길지로 알려져 있다. 골짜기가 있어 차가운 겨울바람에도 따뜻하게 느껴지고 마을 앞에는 안락천이 흐르고 경상도 최대의 평야가 있어 살기 좋은 곳이다.
원래 풍덕유씨의 터전이었으나 월성손씨가 장가와서 머무르게 되었다고 한다. 사위도 재산을 유산으로 상속받게 된다. 양동마을은 외손 딸들이 잘 된다고 한다. 월성손씨, 여강이씨 딸 손들이 번성하였다.
서백당, 무첨당, 향단, 관기정은 임진왜란 때에도 불타지 않고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우재 손중돈과 조카인 회재 이언적이라는 큰 인물이 나왔다. 명문가의 바탕은 큰 인물과 재력, 문필봉이 있어야 한다. 이곳저곳을 관람하면서 한복을 입고 걸어오고 있는 회재 이언적의 후손을 만나 마을과 회재에 관해 자세히 들을 수 있었다.
|
양동마을은 명당에 터를 잡고 가풍이 있고 가문에 대한 자존심이 강하다. “무첨당”은 나를 세상에 오게 하신 분을 욕되지 않게 살겠다는 뜻이다.
손중돈은 고위직에 있으면서도 이권에 개입하지 않고 끓임 없이 자신을 성찰하며 청빈을 생활화하여 청백리가 되었다. 상주 목민관과 판서를 역임하면서 우참찬을 끝으로 공직생활을 마무리하고 66세에 졸하였다.
어진 목민관으로서 선정을 베풀었던 손중돈의 죽음을 중종도 안타까워하여 조회도 열지 않았다고 한다. 회재 이언적은 손중돈의 생질이며 자신을 자식처럼 가르치고 특별히 보살펴준 외삼촌에 대해 애통해하며 그리워했다.
이언적은 사간원에 있을 때 연산군의 폭정을 바르게 직언하다가 탄핵을 받고 낙향하여 자계천 독락당에서 칩거하면서 몸과 마음을 닦았다. 그 후 다시 부름을 받아 복권되었다. 당시 말 한마디 잘못하면 목이 달아날 수 있는 엄혹한 시기였으나 영남사림의 영수로서 중종에게 바른 정치를 진언했으며 임금도 귀담아들었다.
1545년 을사사화 때 임금 앞에서 바른말 하다가 관직을 삭탈당하고 위리안치되었으나 어린 임금 명종을 걱정하였다. 9월에 아우들에게 부모님을 부탁하고 평안도 강계에 유배되었다. 7년간의 유배 생활 중에도 봉선잡의, 대학장구보유, 진수팔규 등 필생의 글을 남겼다. 1553년 겨울에 유배지에서 졸하자 아들이 고향으로 운구하여 7년 만에 귀향하였다.
이언적은 광해군 2년에 이황, 조광조, 정여창, 김굉필과 더불어 동방 오현으로 배향되어 추앙받는 인물로 여강이씨 문중에서 불천위 제사를 지내게 되었다. 선비로서 아름다운 삶과 향기가 느껴진다. 월성손씨와 여강이씨 문중에서 3명의 현자 중 2명이 나왔으나 1명을 더 기다리고 있다고 한다.
|
우리는 인근의 옥산서원으로 이동하였다. 옥산서원은 영남의 2대 서원 중의 하나로 회재 이언적의 선비정신을 받들어 만들어진 사액서원이다. 옥산서원 부벽루의 현판은 한석봉이 썼으며 100여권의 서책이 있고, 이항복, 유성룡 등 경주권 사림을 대표하는 명문서원이다.
서원은 사립중등교육기관으로 입학시험을 통해 명망 있는 유생을 선발하고 선비가 되는 길잡이를 가르치고 원규를 지키게 했다. 원생은 활쏘기를 하고 자유롭게 술을 마셨으나 여자출입은 금했다.
기숙사인 민구제, 압수제, 서고인 장경각이 있어 좋은 장서가 보관되어 있으며, 서책은 불출하고 장서와 삼국사기 2권을 보관하고 있으며 당시에도 자체출판이 가능했다. 이것이 가장 큰 보물이다.
|
서원의 하루일과는 여명에 일어나 이부자리 정리하고 몸을 씻고, 마당청소, 의관 정리하고 책을 읽고, 출석을 점검하였다. 식후에도 강의를 들으며 강의가 없을때에는 스스로 학문을 닦았다. 오후에는 휴식을 취한 후 정신이 맑으면 성현의 글을 읽었다. 매일 학문연구의 연속이었다.
교수강의 후 시험을 실시하여 통, 약, 조, 불통으로 평가하였다. 회재 이언적의 가르침인 인을 구했다. ‘인’은 인간이 태어날 때 가지고 있는 본성으로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것이다.
소학은 도덕교과서로써 마땅히 인간으로서 해야 할 일을 해야 하는 것이다. 어른께 인사하고, 친구와 사귀는 것은 늙어 죽을 때까지 놓지 말아야 할 기본 윤리이다. 소학의 본질은 지행합일로 아는 것을 실천하는데 있다. 아는 것을 실천하지 않으면 죽은 지식으로 선비는 아는 것을 실천하고 살아야 했다.
|
옥산서원에서 700미터 떨어진 곳에 독락당이 있어 솔향기를 맡으며 명상하듯 걸어가니 정신이 맑아지는 느낌이다. 낙향하여 그곳에서 수양과 학문연구에 전념하였다고 한다.
오늘은 마치 정월 대보름이라 풍물놀이와 당제를 올리며 마을에서 떡국과 과일 막걸리를 준비하여 마을주민과 지나가는 과객까지 대접하였다. 주민들과 식사를 함께하면서 양동마을에 대해 소상히 들을 수 있었다. 경주의 최부자처럼 지나가는 과객에게 융숭하게 접대하는 선비 마을의 훈훈한 정을 느낄 수 있었다.
대한미디어그룹/대한교육방송 편집국장 윤은상 kedu8114@naver.com
2026.03.06 06:3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