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벽' 과 ' 봄', 두 지식인이 바라본 열림의 순간 - 최치원이 본 '새벽', 닫힌 것이 열리는 시간... 대한교육방송 |
| 2026년 08월 27일(목) 11: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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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치원이 본 '새벽' : 닫힌 것이 열리는 시간
「고운 최치원 선생의 풍류정신」을 주제로 대학원 학위논문을 쓰면서 「영효」를 필자는 처음 읽었다. 그 글에서 만난 '새벽'은 단순히 하루가 시작되는 시각이 아니었다. 밤에 가려졌던 산천이 다시 모습을 드러내고, 사물의 형상이 차츰 열리며, 멈추어 있던 세상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는 순간이었다. 최치원은 이를 "물상이 장차 열리려 한다(物像將開)"고 표현했다.
작품의 결말에 이르면 '새벽'은 한층 더 장대한 열림으로 확장된다.
기분 상쾌한 맑은 새벽이 되니 나의 영혼은 푸른 하늘처럼 맑아지는 듯한데, 드높은 해 그림자 온 천하에 탕탕(蕩蕩)하고, 돌아가는 어둠을 바위 구렁으로 쓸어 넣는다. 천문만호(千門萬戶)가 비로소 열림에 끝없이 넓은 천지가 활짝 열리었구나. —「영효」 中
어둠이 걷히자 최치원의 혼까지 푸른 하늘처럼 맑아진다. 마침내 천문만호가 열리고 넓은 천지가 모습을 드러낸다. 그에게 '새벽'이란 밤이 끝나는 시각이 아니라, 닫혀 있던 것이 열리고 어둠이 물러가며 새로운 천지가 드러나는 시간이었다.
▶조광조가 본 '봄' : 도덕 질서의 회복
오랜 세월 뒤 조광조는 「춘부(春賦)」에서 '봄'을 노래했다. 그의 '봄' 역시 단순한 계절에 머물지 않는다. 그는 봄과 인(仁)을 연결하여, 생명이 되살아나는 자연의 질서 속에서 인간과 세상이 회복해야 할 도덕적 질서를 읽어낸다. 공자의 제자 안자(顔子)가 인을 실천하고자 했던 자세를 되세기며 인간이 지켜야 할 도덕적 삶을 말한 뒤, 그는 글의 마지막을 하나의 물음으로 맺는다.
"하늘에 있어서는 '봄'이요, 사람에 있어서는 '인(仁)'이로다. 모두가 태극을 근본으로 하여 다르면서도 같거니, 이를 아는 사람 누구인가?"
'이를 아는 사람 누구인가?' — 필자는 이 물음에서 단순한 계절 찬미를 넘어, 자신이 살아가던 시대를 향해 던지는 조광조의 물음을 읽는다.
▶'새벽'과 '봄'이 만나는 자리
두 작품에서 필자는 하나의 정신적 대응을 본다. 최치원의 '새벽'에는 열림이 있고, 조광조의 '봄'에는 소생과 회복이 있다. '새벽'이 어둠 속에 가려졌던 세계를 여는 시간이라면, '봄'은 겨울 속에 잠들었던 생명을 깨우는 시간이다. 그런 의미에서 '새벽'은 하루의 '봄'이고, '봄'은 한 해의 '새벽'이다.
물론 최치원의 사상이 조광조에게 직접 계승되었다고 단정할 근거는 없다. 두 사람은 같은 시대를 살지도, 같은 사상적 뿌리를 지니지도 않았다. 그러나 어둠에서 밝음으로, 겨울에서 봄으로, 낡은 것에서 새로운 것으로 향하는 그 정신의 방향만큼은 놀랍도록 닮아 있다.
▶시대의 벽 앞에서
두 사람의 삶을 함께 놓고 보면 그 울림은 더욱 깊어진다. 최치원은 당나라에서 돌아와 기울어 가는 신라를 바로 잡고자 했으나 뜻을 다 펼치지 못했다. 조광조 역시 도덕 정치와 개혁의 이상을 현실에 세우려 했으나 기묘사화 속에서 생을 마감했다. 한 사람은 시대의 벽 앞에서 세상과 거리를 두었고, 한 사람은 시대의 벽 앞에서 죽음을 맞았다. 그러나 그들이 바라보았던 '새벽'과 '봄'까지 함께 사라진 것은 아니다.
필자는 두 사람 사이에서 직접적인 사상의 계보를 찾으려는 것이 아니지만, 다만 서로 다른 시대를 살았던 두 지식인이 인간과 시대가 새로워져야 한다는 하나의 꿈을 품었다는 것, 그리고 그 꿈이 ‘새벽’과 ‘봄’이라는 새 생명의 언어를 통해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은 필자의 마음에 깊은 울림을 남긴다.
‘최치원의 새벽’은 끝나지 않았고, ‘조광조의 봄’도 죽지 않았다. 한 시대가 이루지 못한 꿈은 다음 시대의 정신이 되어 다시 깨어난다. 역사는 그렇게 새 생명의 숨을 이어간다.
대한교육방송
